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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타인의 고통에 아픔을 느꼈던 작은 자의 투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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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 강연문에서 던진 질문은 계엄 사태가 벌어진 한국 사회 전체를 휘감았다. TV로 계엄이 선언되는 장면을 목도한 순간 모든 이들이 1980년 5월 18일의 광주를 떠올렸다는 점에서, 거리로 나와 탄핵을 외친 수많은 시민이 억울한 희생자들의 핏값으로 한국의 민주주의가 쌓아 올려졌다는 것을 되새겼다는 점에서, 과거는 현재를 돕고 있는 중이며 죽은 자는 산 자를 구하는 중이다. 과거와 현재, 죽은 자와 산 자의 연결은 절대 우연이 아니다. 과거의 비극은 항상 현재의 문을 두드려 왔고, 죽은 자들의 억울한 외침은 우리의 일상 곳곳을 조용히 진동해 왔다.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그 목소리들을 듣지 못한 것은 산 자들이 현재의 지리멸렬함 속에 매몰되어 주변을, 과거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계엄이라는 비상사태가 도래해야만 각성할 수밖에 없었던 현재의 우리는 과거와 죽은 자들에게 고마워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뒤늦게 그 장면과 그 목소리들을 자각하게 된 우리의 태도를 반성하고 미안해해야 한다. 12월 24일 개봉하는 우민호 감독의 「하얼빈」은 이 사실을 더욱 강하게 각인시킨다.

「하얼빈」은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을 다룬다. 역사의 빈틈 사이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사건이 아닌 인물들의 감정과 갈등에 초점을 맞춘다. 일제 강점기 속에서 국권을 되찾으려는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을 역사는 ‘영웅’이란 칭호로 보상해 왔다. 국어사전은 영웅을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이라 정의한다. 목숨을 내걸고 조국의 해방을 위해 온 삶을 투신한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은 분명 영웅적이라 명명할 수 있다. 하지만 「하얼빈」은 그들을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얼빈」의 독립운동가들은 동료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끼고, 거사 앞에 두려워 떨기도 하며, 일본군의 무차별한 고문 속에서 동료를 배반하는 모순적인 인물들일 뿐이다. 「하얼빈」이 그들을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묘사한 것은 독립운동가 또한 영웅이 아닌 소시민에 불과한 존재들이었다는, 그래서 현재의 소시민들 또한 그들과 같은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비상사태 속에서 영웅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그 불가능성이 역설적으로 역사의 변곡점을 만들어왔다는 깨달음을 일깨우기 위함이다.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는 독립군들. ⓒCJ ENM
▲일본군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하는 독립군들. ⓒCJ ENM

영화의 도입부를 차지하는 함경북도 회령 전투. 우민호 감독은 전쟁의 참혹함을 드러내기 위해 안중근(현빈)의 시선을 잠시 빌린다. 그는 이성을 잃은 채 진창 속을 헤매는 일본군과 독립군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본다. 컬러에서 흑백으로 전환된 안중근의 시선은 이후 일본군을 만국공법에 따라 풀어주는 결정적 단서로 작용한다. 안중근이 풀어준 포로들이 독립군을 공격해 다수의 동지들을 잃었던 사건은 역사적으로 자세히 기록된 사실이다. 사료에는 기록되지 않았던 ‘왜 풀어줬는가’에 대한 질문의 해답을 그 동안 국가는 ‘영웅’이란 칭호를 붙여 해석해 왔다. 그는 영웅적인 면모를 지닌 자였기에 조국의 원수임에도 대의명분에 따라 풀어줬다는 것이다. 「하얼빈」은 이러한 영웅적 면모와는 거리를 두고 대신 사료들 사이에 담겨있지 않은 안중근의 심리 속을 파고든다. 온몸이 진흙으로 뒤덮여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조차 안 되는 전투장에서 내가 살기 위해 타인을 죽여야 하는 현실은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한 존재를 살육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안중근이 깨달았을지도 모른다는 영화적 상상력이 그를 영웅이 아닌 한 인간으로, 아픔을 느끼고 그에 반응하여 괴로워하는 한 작은 자로 묘사한다.

▲회령 전투에서 패한 뒤 러시아 연추에 모인 독립군들. ⓒCJ ENM
▲회령 전투에서 패한 뒤 러시아 연추에 모인 독립군들. ⓒCJ ENM

이에 더해 영화는 안중근에게 빛과 어둠의 뚜렷한 경계를 선사한다. 「하얼빈」에서의 빛과 어둠은 일반적으로 느와르 장르가 도식화 해놓은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이분법을 따르지 않는다. 「하얼빈」의 빛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영역이며 어둠은 그로부터 등을 돌리고 잠시 두려워 떨 수 있는 안식의 영역이다. 이토 히로부미(릴리 프랭키)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이 일본군에 노출되어 모든 작전을 중단하려 할 때 그는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다 빛 가운데로 얼굴을 내밀고 절대 중단해서는 안 된다며 최재형(유재명)을 설득한다. 자신 때문에 죽어야 했던 동지들에 대한 죄책감, 수많은 전투 속에서 동지들을 잃어야 했던 상실감, 한 존재로서는 쉽게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감정들이 휘몰아칠 때 그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흐느껴 운다. 그 순간의 어둠은 그에게 안식의 공간이자 위로의 공간이다. 잠시 울어도 된다고, 감정을 드러내며 약해져도 괜찮다며 품어 안는 어둠의 따듯함이 잠시 안중근을 가려준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 암살을 절대 중단하지 않았던 이유를 영화는 ‘먼저 간 동지들을 기억하기 위함’이라 해석한다. 그들의 죽음은 오로지 조국의 해방을 위한 것이었기에 그 해방을 이뤄내는 것이야말로 죽음의 의미를 지켜내는 길이란 뜻이다. 안중근이 지키려는 강한 신념은 빛으로 얼굴을 내밀고 최재형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으며 더욱 확고해진다. 하지만 아파하는 자와 결단하는 자 사이의 경계는 이분법으로 분명하게 나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역사의 변곡점에 서 있는 자들에게 아픔과 결단은 매 순간 공존하고 뒤엉켜 휘몰아친다. 아픔을 느끼기에 결단할 수 있으며 타인의 고통이 나의 것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행동할 수 있는 법이다. 어둠 속에서 흐느껴 울다 빛 가운데로 얼굴을 내밀었을 때 일그러진 안중근의 얼굴. 고통과 두려움, 고집과 분노가 뒤엉킨 쉽게 해석할 수 없는 안중근의 표정이야말로 빛과 어둠의 경계에 선 자들이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단서다.

「하얼빈」은 ‘기억’이란 단어를 대사 속에서 여러 번 반복한다. 먼저 떠난 자를 기억해야 한다는 책임은 남아 있는 자들의 몫이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그들은 목숨을 바쳐 조국의 해방을 위해 투신한다. 하지만 죽은 자를 기억한다는 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이 일본의 역사로 남아 있게 된다면 아무도 우리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두려움, 먼저 떠난 동지들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사를 치러야 한다는 단단한 결의, 비겁할지라도 내 존재를 후대에 기억시키기 위해서 변절도 허락되어야 한다는 비겁함까지, 수많은 감정과 판단들이 충돌하고 결합하는 과정 속에서야 비로소 기억이란 행위는 가능할 수 있다. 한강 작가 또한 과거와 현재를, 죽은 자와 산 자를 연결 짓는 과정이 그리 간단하지 않았음을 소감문 속에서 토로한 바 있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진 ‘기억’을 절대 쉽고 단순한 행위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하얼빈」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투사들의 선택이 미래의 후손들을 위한 것이 아닌, 함께 싸우다 먼저 떠난 자들을 위한 것임을 끊임없이 되새긴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는 안중근과 공부인(전여빈). ⓒ회령 전투에서 패한 뒤 러시아 연추에 모인 독립군들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기다리는 안중근과 공부인(전여빈). ⓒ회령 전투에서 패한 뒤 러시아 연추에 모인 독립군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을 정확히 진단한다. 어리석은 왕과 부패한 유생들이 지배해 온 나라지만 국난이 있을 때마다 받은 것도 없는 백성들이 이상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이토의 부하가 지금은 이순신과 같은 영웅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할 때 이토는 답하지 않는다. 이후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 영화는 보여주지 않은 채 곧바로 안중근의 서사로 시선을 돌리며 안중근이 이순신과 같은 영웅임을 서사적으로 지시한다. 하지만 안중근은 영화의 첫 도입부와 마지막 장면에서 당차고 결의에 찬 얼굴이 아닌, 초췌하고 겁에 질려 있으며 한없이 지친 모습으로 두만강을 건넌다. 당대에 누군가 그에게 “당신이야말로 영웅이요”하고 외쳤다면 극구 손사래를 치며 부인했을 모습이다.

그의 표정과 행색에서 시대가 기억하는 영웅으로서의 면모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행적은 분명 영웅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영웅으로 만드는가? 「하얼빈」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쉽게 내놓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이룬 업적만으로 영웅이라 칭해왔다면 역사의 변곡점을 향해 투쟁했던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었음을, 독립에 대한 투철한 의지로 똘똘 뭉친 투사가 아닌 동지의 죽음에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며 죽은 자를 기억하려 했던 자들이었음을 각인시킨다. 다시 역사의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는 현 시국에서 과연 우리는 누구를 영웅으로 기억하려 하는가? 「하얼빈」이 던진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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